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풀어쓰는 다산 이야기

문주님 2006. 4. 26. 11:00

 

 

사암선생연보(俟菴先生年譜) 


기록이란 정말로 중요합니다. 인류의 역사에서 만약 기록이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. 인간이야말로 망각의 동물인데, 인간이 살아온 흔적의 기록이 없고서야 역사가 존재나 했겠습니까.

『사암선생연보』는 약해서 『사암연보』라고 일컬어지는 2권으로 된 필사본의 책으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. 원본은 영인본으로 나와 어디에서나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책이지만, 그 원본 기록의 존재야말로 그 소중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.

이 연보는 바로 다산 정약용선생이 출생하여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날까지의 삶의 족적을 기록한 책입니다. 우리는 흔히 다산(茶山)이라는 호로 정약용선생을 일컫지만, 선생의 호는 다산 말고도 사암(俟菴), 탁옹( 翁), 열수(洌水) 등 많은 호로 불려졌습니다. 다산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공식적인 호는 ‘사암’이었고 다산은 주로 남들이 불러주는 호였습니다.

『사암연보』는 다산이 세상을 떠난 뒤 85년 되던 1921년에 다산의 손자 정대림(丁大林)의 손자, 즉 다산의 현손(玄孫)이던 정규영(丁奎英)이 2권으로 편찬한 책입니다. 다산이 1762년 음력 6월 16일 사시(巳時:10~11시)에 태어나 75세이던 1836년 음력 2월 22일 진시(辰時:8~9시)에 세상을 떠났으며, 그해 4월 1일 유명(遺命)에 따라 집 뒤란에 장사지냈으며, 사후 74년째인 1910년 7월 18일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복권되어 정헌대부(正憲大夫) 규장각제학(奎章閣提學)에 증직되고 문도(文度)라는 명예로운 시호(諡號)가 하사되었다는 글로 연보는 끝나고 있습니다.

그런 대학자를 18년이나 귀양 살게 하고 죽은 뒤 74년까지 복권도 시켜주지 않았던 조선왕조는, 그 망국 직전에 정2품 규장각제학이라는 벼슬을 증직하면서 문자(文字)시호까지 내리는 절혜(節惠)의 의식을 베풀었던 것입니다.

다산 자신의 자서전 격인 「자찬묘지명」이 있고 그의 저술 대부분이 수록된 『여유당전서』가 있으며, 또 후손이 기록한 이 연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는 다산의 생애를 넉넉하게 알아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. 그래서 기록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.
다산연구소